이주영의 무용읽기_2023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

춤미학 구현의 화수분
한국현대춤협회, ‘2023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

이주영 칼럼니스트 승인 2023.08.25 20:59 | 최종 수정 2023.08.26 08:44 의견 0

[댄스TV=이주영 무용평론가] 1987년 시작된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이하 작가전)’은 한국 현대춤(Contemporary Dance)의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로 37회째를 맞이한 2023년도의 공연 또한 역사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춤의 동시대성과 작가성이란 키워드는 확장했다. 한국현대춤협회(회장 손관중)의 헌신과 참여 작가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가전의 메인 공연장인 아르코예술극장의 공사로 인해 7월(7.5~13)에 개최된 이번 무대는 7월의 태양처럼 작가들의 고민한 흔적이 객석에 아로새겨졌다.

첫 번째 그룹(7.5~6)의 첫 작품은 김상진의 ‘결’이 연다. 전 국립발레단 단원인 김상진은 최윤지와 호흡을 맞췄다. 무대 왼쪽 직사각형의 세트에서 김상진이 나온다. 고독함이 흐른다. 최윤지가 세트속에 앉아 있다. 잔잔한 음악 속 두 명이 그려내는 춤의 심상(心想)은 독주이자 이중자가 된다. 오케스트라 피트 아래로 남자 무용수가 떨어진다. 붉은 조명 속 춤향을 흩날리며 마무리 된다. 작품 제목처럼 결(結)과 결(決)이 직조된 무대다. 맺고 튼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라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도 있지만 춤작가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인생무상을 담지 않았다. 비움과 채움의 균형을 노래했다. 결이 좋다.

김상진의 ‘결’

엎드려 장단을 탄다. 느림과 빠름의 교차를 보인다. 구미시립무용단 안무자로 올해 계명대학교 전임교수가 된 김현태는 ‘꽃.물’을 기호성 있게 담아냈다. ‘꽃’과 ‘물’이 지닌 각각의 의미가 한 단어로 합성된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음절의 단어를 그대로 살리는 조어성(造語性)을 춤성으로 치환한다. 비트있는 음악 속에 춤의 중력을 오가며, 호흡과 움직임을 꽃물처럼 물들인다. 때론 하얗게 지워낸다. 나(我)라는 우주의 중심을 둘러싼 반경(半徑)의 원심력과 구심력은 투명과 반투명의 시소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삶을 나이테를 춤으로 바라보게 하는 통찰력이 엿보였다. 꽃물처럼 삶을 물들였다.

김현태의 ‘꽃.물’

이번 작가전에서 깊은 잔상을 남긴 작품이다.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인 문지애는 ‘Ver-티아이-go’라는 안무작을 통해 작가성을 고양했다. 현기증이라는 뜻을 지닌 ‘vertigo’. 공교롭게도 ‘버티고’라는 우리말과 묘한 합을 이룬다. 버팀은 결국 구도(求道)다. 진실을 향한 뜨거운 질주다. 허상에 대한 강렬한 도전이자 자아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진실’이란 의미를 지닌 ‘ver’, 롱샷에서 클로즈업샷으로 이동하는 영상기술인 ‘티아이(ti)’, ‘가다’의 의미를 지닌 ‘go’가 삼박자 돼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최재혁, 문지애의 2인무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손관중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춤의 사운드’를 보여주고, 들려줬다. 허상의 껍질을 벗겨내 진실의 본질을 갈구했다. 생(生)의 화살을 정확히 과녁에 겨눠 명중시킨다. 공연 말미 퍼즐같은 영상 속으로 문지애가 매달려 올라간다. ‘하나’라는 이름을 새긴다. ‘진실 가까이에 다가간다’의 의미가 명징하게 다가온다.

문지애의 ‘Ver-티아이-go’

작품 제목처럼 ‘안온(安穩)’하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 신승원 동덕여대 교수는 이영철과 안온의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시간 여행이다. 우리의 시간을 노래한다.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흐르는 그 맛이 곰삭다. 좋은 피지컬로 춤선의 미학성도 무대에 드리웠다. 조용하고 편안함의 안온은 중심에도 있지만 그 테두리, 경계에도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유깊다.

신승원의 ‘안온(安穩)’

두 번째 그룹(7.8~9)의 첫 문은 신창호 한예종 교수가 열었다. 렉쳐(lecture) 형식을 띠었다. 무겁진 않다. 박지희, 신창호가 출연한 ‘Minimal Scene’는 ‘미세한 신체 움직임의 파동에서 시작된 행위는 실제 가치 평가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실제 무대에서도 ‘무용상품의 소비 촉진’이라는 프로모션 전개를 통해 이채로움을 줬다. ‘NFT(Non-Fungible Token)’가 주목받는 때에 시의성을 갖춘 작품과 흥미로운 주제를 통해 실제 움직임의 가치, 무용의 가치를 환기시켜 의미를 더했다.

신창호의 ‘Minimal Scene’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 클라라를 사랑한 슈만의 제자 브람스. 이들에 얽힌 사랑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은 끊이지 않고 무대에서 이어오고 있다. 한예종 김용걸 교수의 안무로 박윤선, 전민철이 중심이 돼 무대를 전개한 이 작품은 클라라의 이름에서 따 만든 비밀암호 ‘C-B-A-A’라는 음을 작품으로 옮겨왔다. 음이 춤으로 새롭게 변주된다. ‘진정한 사랑의 감정’에 대해 천착해 풀어낸다. 서정성있게 감정선의 교차를 탐미한다. 떠나는 클라라와 남겨져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춤표에 아로새겨지는 순간이다.

김용걸의 ‘C-B-A-A’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닮아가는 중’이라는 금배섭(춤판야무)는 ‘닳아가는’이라는 현재진행형 제목을 선택했다. ‘닳아짐으로 인해 닮아간다’는 표징이 뚜렷하다. 비닐종이 같은 오브제의 활용, 닳음과 닳아짐에 대한 문답, 반문, 수용이 교차된다.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금배섭의 ‘닳아가는’

그 달의 마지막 날인 그믐. 제주도립무용단 예술감독인 김혜림은 ‘그믐’이라는 한국적 정서와 어울리는 소재를 주제로 삼았다. 불확실성, 불안, 불투명 등 어둠이 드리워진 달의 희미한 빛은 또 하나의 여명이다. 막바지에 다다를 것 같지만 다시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는 달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동시에 호명한다. 달 세트를 배경으로 김재덕 특유의 음악과 어우러진 그믐의 풍경은 그림자 풍경이자 또한 태양 풍경이 된다. 함의성 크다.

김혜림의 ‘그믐’

연륜 깊은 무대를 선보인 세 번째 그룹(7.12~13)의 첫 작가는 이윤경 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다. 깊은 호흡과 함께 시작되는 ‘춤고백 2023’. 장단, 구음이 춤과 어우러진다. ‘자유’에 대한 성찰 가득한 이 작품은 위로와 격려의 의미가 담지됐다. 한국적 음악, 정서가 현대성에 부딪혀 고백을 노래한다. 다양한 심상을 풀어내고자 한 모습이 역력하다.

이윤경의 ‘춤고백 2023’

또 다른 고백이 시작된다. 서울시무용단 단장인 정혜진의 ‘독백’이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낸 혜경궁 홍씨의 마음이 고스란히 무대에 담겼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뒤주를 가지고 있다’라는 울림있는 말은 극성(劇性) 강한 춤을 통해 힘을 발휘된다. 아이를 먼저 보낸 어머니의 마음이 호소력있게 다가온다. 인내하는 삶의 무게가 독백을 넘어 합창까지 다다른다.

정혜진의 ‘독백’

68세의 발레리나 조윤라 충남대 명예교수는 현역 무용가의 힘을 이 날도 어김없이 보여줬다. ‘Waltz#10’에서 김희현, 조윤라는 서정성 깊은 2인무로 비상을 노래한다. 시간의 감정이 사랑의 감정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춤의 왈츠요, 왈츠의 춤이다.

조윤라의 ‘Waltz#10’

‘춤추는 자에게 춤은 생이고, 구원이자 자비’임을 역설하는 정은혜 충남대 교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작품으로 작가전 대미를 장식했다. 인간의 존재, 가치, 물음에 대한 답을 춤으로 녹여낸 춤작가는 한국적인 정서와 오브제를 적극 활용했다. 차분히 춤을 그려나가되 그 속에 율(律)을 부여한 모습이 선명하다. ‘멍석’은 천, 옷, 무덤, 집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된다. 삶과 닮았다. 오브제, 의상의 적극적 개입은 춤에 힘을 부여해 침잠된 사유 체계를 부유케했다. 존재의 의미를 사유깊게 써내려 간 작품이다.

정은혜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2명 춤작가의 무대. 작가전의 가치를 올해도 풍요롭게 담아냈다. 춤미학 구현의 화수분이 된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 작가성은 춤의 뿌리이자 열매다.

이주영(무용평론가・고려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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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댄스TV= 이주영(무용칼럼니스트)-이주영의 무용읽기_2023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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