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의 무용읽기_2021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

아르코예술극장 40년 춤 역사를 담다
<제35회 2021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

이주영 칼럼니스트 승인 2021.05.01 05:00 | 최종 수정 2021.05.05 08:51 의견 0

지난해의 아쉬움을 날리다. 10명의 작가 참여,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한 공연 진행 으로 작가12인전 외형이 살짝 바뀐 작년. 올해는 코로나19 상황은 여전하지만 기존의 패턴이 다시 적용돼 반가웠다. 35주년을 맞이한 한국현대춤협회(회장 손관중) 주최의 <2021 한국현대춤 작가12인전>(2021.3.27~4.4,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이하 ‘춤작가전’). 춤작가 정신에 기반해 자신만의 춤 에너지를 발산한 이번 춤작가전은 무용 공연의 메카인 아르코예술극장 40년 역사 속 춤 무대에 올랐던 작품 중 선별, 무대화했다는 의의도 지닌다. 한국 춤의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춤작가전의 의의가 고스란히 담겨 춤의 바다에 유유히 흘렀다.

차진엽, ‘리버런 : 불완전한 몸의 경계’©IRO


첫 날 첫 무대는 현대무용하면 떠오르는 차진엽의 ‘리버런 : 불완전한 몸의 경계’가 연다. 등장부터 화려하다. 신선한 감각의 소유자가 보여주는 다양한 스타일의 영상 배경은 패턴의 반복성이 강하다. 에지 있는 움직임이 이어진다. 시각예술가 빠키와의 문답이 사이버 세상에 온 듯한 환영을 주는 이 작품은 2015년 초연작 ‘리버런 : 달리는 강의 현기증’의 연작이다. 작품의 연속성은 부여하되 무한 반복의 삶의 구조를 이채롭게 담아내는 작가성은 배가시켰다. 이어진 작품은 조재혁 안무의 ‘현一’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한자 ‘일(一)’의 함의가 무대에서 악과 몸의 일체성을 담아 연주와 움직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조재혁은 연주자와 같이 등장해 차를 따르기 시작한다. 몇 가지 움직임 이후 현(絃)의 마찰이 이어진다. 현일(一)의 경지로 향한다. 움직임의 가속도가 더해진다. 아쟁의 농현 후, 차를 따르면서 마무리된다. 다도(茶道)의 찰나에 담은 무한의 포물선이 그윽하다. 현현(顯現)하다.

조재혁, ‘현一’©손관중


손관중 교수의 작품 ‘적’ 시리즈는 그의 대표 연작이다. 이번 춤작가전에서는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된 ‘적Ⅷ-공간플러스’가 선보였다. 공간에 철학을 부여하고, 사이버와의 대화를 통한 휴먼성이 침잠된 수작(秀作)이다. 공연 시작되면 무대 왼쪽에 줄이 내려와 있다. 이상과 현실, 가상과 현존이 공간 사이로 투영되고 분출되는 단초를 마련하는 오브제로 제격이다. 작품을 노련하게 이끌어가는 손관중과 호흡을 맞춘 발레리나 원진호의 역할도 두드러진다. 다수의 국제 발레 콩쿠르 수상자답게 좋은 테크닉을 보유했고, 무대 흡수력과 장악력이 좋다. 무대 우측 후방에서 조명 들어올 때 물 맞는 장면은 시공간의 예술인 무용의 미장센을 짧은 시간에 보여준 순간이다. 이날의 마지막 무대는 제임스 전이 장식했다. 제인스 전 발레 스타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수의 작품들이 시간이 흘러도 대중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예술적 영감과 공감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작품은 ‘바람처럼... Like the Wind’. 서울발레시어터 주역 출신인 정운식과 제임스 전은 바람 같은 인생, 인생 같은 바람을 보여준다. 두 명의 솔로가 상호 교차되고 이어지는 느낌이다. 각자 느끼는 삶이지만 그 삶속에는 교집합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있다. 비트 있는 음악 속에서 몰입하게 만드는 춤 물결은 그의 전매특허다. 경쾌한 움직임 속에 담긴 묵직한 사유가 바람처럼 무대를 지나간다.

손관중, '적Ⅷ-공간플러스'©윤석호
제임스 전, ‘바람처럼... Like the Wind’©이진숙
김남식, ‘서시(序詩): 별 하나와 기다림 그리고...’©임채욱

둘째 날 첫 작품은 현대무용가 김남식이 연다. 실험성, 회화성, 오브제 활용 등 흥미진진한작품 세계로 관객의 발길을 재촉하는 김남식의 ‘서시(序詩): 별 하나와 기다림 그리고...’. 그는 딸의 손을 잡고 무대에 등장한다. 바람소리 거세진다. 바람, 구름, 하늘... 자연과 함께하는 느낌 강하다.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삶. 그 삶을 관조한 춤의 텍스트화는 잔잔하면서도 단단한 드라마성을 부여한다. 수필 같은 느낌이다. 한 시인의 삶을 노래하면서 당대의 삶의 이야기를 회화적인 움직임으로 채색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춤시로 탄생됐다. 새벽과 닮은 김남식의 ‘서시(曙詩)’다. 이어진 무대는 이번 춤작가전에서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다.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역임 후 천안시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인 김용철 무용가다. 흑(黑)을 통해 백(白)을 말한 ‘흑살풀이’. 무대 한 바퀴 돌며 작품은 시작된다. 천으로 전신이 뒤덮여있다. 도는 속도가 빨라진다. 공간을 가르는 검은 천 자락의 물결은 살풀이에서 흑살풀이로의 아름다운 변화를 앞당긴다. 새로운 숨이 교차되는 순간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미학적으로 볼 때, ‘재연(再演)’과 ‘재현(再現)’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이를 통해 예술적 개방성이 중요한 춤작가전의 표정을 더욱 환하게 한다. 장단과 비트 속 매혹적인 흑살풀이의 표정이 살아날 땐 어느새 살풀이라는 이름은 창공 밖이다. 흑살풀이 이름만이 선명하다.

김용철, '흑살풀이'©윤석호


설명이 필요 없는 스타 발레리노 교수인 김용걸은 ‘망각(Obliviate)’이라는 작품을 통해 잊어버림에 대한 기억을 보여준다. 그 기억은 망각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기도 하고, 고요히 잠들기도 한다. 이 작품에선 움직임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또 하나의 텍스트가 생성됨을 발견할 수 있다. 안무의 깊이를 보여주는 단초다. 김다운과의 듀엣을 이룬 밀도는 기술과 감정을 공존시킨다. 일련의 안무자가 보여준 서정성 기반의 서사성, 사회성, 드라마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들숨과 날숨처럼 발산됐다. 무대 중앙에서 예를 올린다. 단장인 정혜진은 서울시무용단원 2명과 함께 ‘가문(家門)’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채워나갔다. 자신은 중앙에 위치하고, 무대 좌우에는 두 명이 배치된 공간 분할 구조에서다. 1999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초연작을 새롭게 만난 시간이다.

김용걸, ‘망각(Obliviate)’©손관중
정혜진, '가문'©손관중


셋째 날 첫 작품은 박호빈이 연다. 시간에 의해 드러나는 만물의 작용과 반작용을 그린 ‘시간속의 음영’은 시간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한다. 처음 등장할 때 아우라 가득하다. 파란색 의상 입은 박호빈 특유의 몸놀림과 기술은 영혼을 서서히 불어넣기 시작한다. 미묘한 차이에 깊이와 정취가 달라지는 음영(陰影). 시간이 여기에 결부될 땐 더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 음영을 시간 속에 절묘하게 매달았다. 다음 작품은 2020년 관객평가단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문영철의 ‘소풍’이다. 탄생, 삶, 죽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경계를 천상병 시인의 시,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더불어 밀도 있게 그려냈다. 빨간 장미와 하얀 장미가 교차되는 장면 속에서 주제 의식은 더욱 명료해진다. 작년 유니버설아트센터 대극장에서의 감흥이 증폭된 무대다.

박호빈, '시간속의 음영'©손관중
문영철, '소풍'©손관중


순리(順理)에 천리(天理)를 더한 윤미라 교수의 ‘그렇게 흐르다...’는 켜켜이 쌓인 고처럼 매듭진 인생을 표상화 했다. 무대 왼쪽에서 고를 만들기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보여 진다. 고 무덤을 끌고 서서히 돌기도 하고, 나중엔 고를 하늘로 올려보낸다. 탄탄한 구성과 연출은 창작춤 강도를 높이는데 주효했다. 마지막 무대는 조윤라의 ‘내 마음의 수채화’. 살아온 시간의 여정을 춤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과거를 소환하는 영상 후에 2인무로 이어진다. 강동휘와의 앙상블이 좋다. 다양한 감정선을 수채화처럼 아로새긴 무대는 삶에 대한 또 하나의 헌정이다.

윤미라, ‘그렇게 흐르다...’©옥상훈
조윤라, '내 마음의 수채화'©최영모


춤작가전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2019년 처음 도입된 관객평가단의 시행, 기존 추천자 구성에서 벗어나 무용계 외부 추천인을 통한 구성 등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전이라는 의미에 부합되는 작가 정신을 지닌 무용가 선정이 관건이다. 내년은 코로나가 없는 상황 속에서 치열한 춤작가의 무대가 이루어지길 손꼽아본다. 벚꽃보다 아름다운 12송이 춤꽃처럼.

이주영(무용칼럼니스트・고려대 문학박사)

7dancetv@naver.com
Copyright(C)DANCETV, All rights reserved. 저작권자(c)댄스티브이,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댄스TV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