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TV=이주영 무용평론가] 발레로 탄생된 ‘구미호(九尾狐)’. 구미호는 동아시아 설화에서 구전되는 황금빛 털에 9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 괴수, 신수(神獸)다. ‘요괴’, ‘변신술’ 등 여러 상징성이 구비문학과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다. M발레단(단장 양영은)의 초연작, ‘판타지 발레 <구미호>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증과 설렘이 공연 전부터 교차됐다.
M발레단은 창작발레의 산실이다. 지난 10년의 창작 세월이 눅진하게 스며든 땀과 혼의 산물인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이 이를 방증한다. 안무·연출·대본을 맡은 양영은 단장은 신작 <구미호>를 통해 한국창작발레에 또 하나의 바람을 불어넣고자 의도를 명확히 했다. 적중했다. 충분한 가능성을 보였다. ‘구미호’에 대한 독창적 해석, 발레의 형식미와 표현성 구현, 음악과 춤의 결합 등이 서사 속 정경으로 잘 수용됐다.
2025년 8월 23일(평자 2시 관람), 소월아트홀에서 2회 공연된 이 작품은 ‘2025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업 선정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공연장과 단체의 협업이 중요한 이 사업의 취지가 향후에도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아울러 유통 지원사업 등을 통해 여러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만나길 바란다.
작품은 1장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9장 ‘소화의 죽음’까지 이어진다. 신령함의 경지에 이른 구미호 ‘수호’(김희현), 수호의 동생이자 소화와 사랑에 빠진 ‘애호’(정용재), 사랑 때문에 순리를 거스린 귀신을 품고 태어난 소녀 ‘소화’(2시 공연, 현지연)가 그 중심에 있다. 마을사람들을 이끄는 청년 ‘화민’(이창희)과 여자여우들의 수장 ‘미호’(박은비)가 극에 사실감을 부여했다.
현(絃)의 선율에 슬픔이 맺혀 있다. 이 작품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 등 작은 규모로 편성된 연주단이지만 작곡·지휘를 맡은 나실인과 하나된 연주자들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전막발레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필적할 만한 힘을 보여줬다. 발레를 리드하고, 때론 받쳐주는 장치 역할을 했다. 풍요로움을 상승시키기 위해 향후 악단 편성을 확대해도 좋겠다.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린다. 새타니 귀신(어려서 죽은 아이의 혼)을 품은 소화의 탄생을 알린다. 발레리노 두 명이 순차 등장 후 퇴장한다. 남녀 군무가 이어진다. 음악이 사랑을 깨운다. 여자 주인공이 바닥에 엎드려 있다.
깊은 산속 마을 배경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움직임이 애잔하다. 이 공연에서 영상 비중이 상당했다. 계절, 서사, 시공간 등 기능적 측면뿐 아니라 캐릭터의 상황과 심정을 알 수 있고, 알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단출할 수도 있지만 공연 첫 부분을 비롯해 작품에 등장한 무대 우측의 세트 또한 인물의 상징성과 서사를 알리는 기제로 작용했다.
아기자기한 무대 분위기 속에서 경쾌한 춤이 이어진다. 경쾌함이 가신 후, 아련한 여자 솔로춤이 피어난다. 사랑의 2인무가 가을빛처럼 물들기 시작한다. 남녀 파드되(pas de deux)는 난이도 있는 테크닉으로 구현됐다.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남녀 무용수의 솔로 후, 2인무, 3인무까지 연속된다. 남자 여섯 명 군무의 역동성과 등을 든 여섯 명 발레리나들의 우아함이 교차된다. 군무의 힘을 배가시킨 재치있는 안무 처리다.
남자 무용수가 무대 우측 세트 위에서 바라본다. 그리움이 번져 나간다. ‘여우구슬제’ 후, 달 속에 해가 들어간다. 월식(月蝕)이다. 소화의 몸속에 있던 새타니 귀신이 새우니 귀신으로 깨어난다. ‘새우니 귀신’은 강한 원한으로 진화한 악귀로 자신이 깃든 인간의 혼은 완전히 죽이고, 그 몸을 가져 인간세상을 어지럽히는 귀신이다.
붉게 물든 영상에서 여우가 날아다닌다. 삶을 위한 죽음의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여자 여우들의 리더 미호가 지팡이를 두드린다. 발레 <지젤>의 ‘윌리’ 같은 여섯 발레리나들의 움직임이 전진한다. 결연하다. 소화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애호와 함께하고픈 소화는 그의 품에서 영원히 잠든다.
여우와 인간의 운명을 거스른 러브 스토리를 담은 <구미호>는 죽음, 사랑, 이별의 3중주가 점철된 무대다. 구미호에 대한 기존 관점을 새롭게 해석한 창발성이 주효했다. 서사(敍事)의 명징성 강화, 무대의 입체성 증폭 등이 보강되면 좋을 듯하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이 오랜 시간 다져져 웰메이드(well-made)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듯 이 작품이 그 길을 가길 바래본다. 아니 뛰어넘길 기대한다. 초연(初演)이다.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주영(무용평론가・고려대 문학박사・한양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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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댄스TV= 이주영(무용칼럼니스트)-이주영의 무용읽기_판타지 발레 ‘구미호’